한 줄 결론 : 신채호는 고려의 독립당이 몰락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묘청의 광망한 서경 거병(묘청의 난)에 있다고 여겨 이를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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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고려 인종 13년(1135)에 일어났던 ‘묘청의 난’은 신채호의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란 논문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려 했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채호가 정말 묘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어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을 다시 읽어 보며 이를 검토해보았다.1) 이 글은 신채호가 묘청에 가한 평에만 집중할 뿐이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과 이에 대한 신채호의 인식을 검토하지는 않는다.
1. 묘청의 등장과 몰락
묘청(妙淸)은 서경(西京 : 平壤) 출신의 승려로 백수한(白壽翰) ․ 정지상(鄭知常) 등의 추천으로 인종(仁宗)2)의 고문이 되었다(1127년, 인종 5년). 묘청은 인종의 신임을 얻어 서경에 새 궁궐을 지었으며 이곳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과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을 펼쳤다.
하지만 서경 천도는 곧 김부식(金富軾) 등의 거센 반대를 받았다. 또한 묘청이 서경 천도를 꾀하는 과정에서 부린 농간이 탄로났고,3) 서경의 새 궁궐(대화궁)에 벼락이 치는 등 재해가 잇따르면서 결국 인종은 서경 천도를 단념하였다.4)
서경 천도가 좌절되자 묘청은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1135년, 인종 13년). 묘청은 반란을 일으킨 후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하여 대위국의 왕이 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西京征討元帥)로 삼아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결국 묘청은 조광(趙匡)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그 목은 개경에 효시되었다. 반란 또한 이듬해에 모두 진압되었다.
2.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에 나타난 신채호의 묘청 비판
1) 서론에 나타난 묘청의 서경 전역(戰役)에 대한 신채호의 평.
신채호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의 서론에서 ‘묘청의 서경 전역’을 낭 · 불(郎佛) 양가(兩家) 대 유가(儒家),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있다.5) 신채호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전자의 대표는 묘청이고 후자의 대표는 김부식이며,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으로써 조선의 역사가 독립적 · 진취적 기상을 잃고 사회 각 방면에서 노예성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묘청의 서경 전역’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6)
이와 같은 서문의 내용은 사실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묘청’과 ‘묘청의 서경 전역’에 대한 신채호의 평은 매우 달라진다. 신채호가 묘청을 가리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광망(狂妄)하다’라는 말이니, 즉 ‘미친 사람처럼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2) 신채호가 보는 칭제북벌론(또는 독립당)의 진정한 영수는 누구인가?
신채호는 993년(성종 12년)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맞아 대안책을 마련하는 가운데 조정의 신하들이 낭가(郎家) 대 유가(儒家)로 나뉘었으며, 이 때부터 양자의 정치상의 투쟁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7) 이러한 때에 금(金 : 여진족)이 거란과 북송을 멸망시키고 고려에 사대요구를 강요하자, 신채호는 고려 조정 내에서 강렬한 반금(反金) 의식과 함께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이 일어났음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이 칭제북벌론의 영수로 신채호가 꼽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묘청도 여기에 들어있다. 다만 신채호가 칭제북벌론의 영수 가운데 처음으로 소개하는 이는 윤언이(尹彦頤)다. 묘청이 그 두 번째이며, 정지상이 그 세 번째이다. 윤언이는 윤관(尹瓘)8)의 아들로 신채호는 그를 유일한 낭가의 계통으로 소개하고 있다.
신채호에 따르면 이 세 사람은 칭제북벌에 대한 의견은 모두 같으나 서경 천도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달랐다고 한다. 묘청과 정지상은 서경 천도를 주장하고 윤언이는 이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채호는 이 중 윤언이의 의견이 더욱 뛰어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서경(평양)은 북쪽 국경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적의 습격으로 쉽게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
이렇게 보면 신채호는 칭제북벌론과 서경천도론을 구분하고 있으며, 서경천도론과 그 주창자인 묘청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 신채호가 묘청을 ‘광망(狂妄)하다’고 본 이유들
신채호가 묘청의 서경천도론을 비판하고 있음은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신채호는 묘청이 ‘광망(狂妄)하다’라고 비판하지는 않았다.10) 신채호가 묘청을 ‘광망(狂妄)하다’라고 평가한 핵심은 그의 거병(擧兵)에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六. 묘청의 광망(狂妄)한 거동 - 서경의 거병’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묘청의 거병을 극력 비판하고 있다.
① 묘청이 당시 고려 내에서 칭제북벌론으로 기울어진 여론의 우세를 이용해 김부식 등의 반대자를 물리치지 못하고 섣부르게 군사를 일으킨 점.
② 묘청이 비록 반란 후에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인종으로 하여금 서경으로 행차하여 대위국(大爲國)의 국호와 연호를 받기를 구하였으나, 인종으로서는 당연히 용납할 수 없는 반역 행위였다는 점.
③ 묘청이 서경에서 거병하면서 친당(親黨)인 정지상 ․ 백수한 등에게도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아 결국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점.
④ 묘청의 거병과 그 실패는 결국 칭제북벌론자의 와해를 가져왔다는 점(신채호는 윤언이의 실각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이 중 신채호가 묘청을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4번이다. 묘청의 광망(狂妄)한 거병과 실패로 인해 결국 칭제북벌론자(독립당) 전체가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졌으며, 오히려 사대주의파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몽고의 침입과 조선(朝鮮)의 창업이 더해지면서 결국 조선 사회 전반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11) 결국 신채호는 조선 역사의 독립 사상이 패망하게 된 가장 큰 책임을 묘청에게 지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왜 신채호가 묘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처럼 알려졌을까?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을 통해 신채호는 조선 역사의 독립 사상이 패망하게 된 가장 큰 책임을 분명 묘청에게 지우고 있다. 사실 신채호는 묘청의 거병이 실패한 이유도 김부식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묘청이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2)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신채호가 묘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차적으로는 신채호에게 그 원인이 있다. 신채호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에서 분명 묘청의 서경 거병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조선의 독립 사상이 패망하게 된 것이 안타까워 이를 지나치게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채호의 본의를 오독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13)
또한 많은 사람들이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서문만 널리 읽고 본문은 꼼꼼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채호가 묘청의 서경 전역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표현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분명 아니다. 다만 이 사건의 여파로 조선의 독립 사상이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이 신채호의 본 뜻이다.
1) 검토에 사용된 책은 을유문화사에 발행한 《韓國史硏究草》이다.
2) 인종은 고려 1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123년~1146년이다.
3) 묘청은 1132년에 기름을 넣은 큰 떡을 대동강에 담가 두고 그 속에서 기름이 조금씩 새게 하였다. 기름이 물 위로 떠오르면서 오색빛을 내자 묘청은 이것을 신룡이 흘린 침이라고 선전하며 서경의 상서로움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이 일이 곧 탄로나면서 묘청은 유신(儒臣)들로부터 거센 반대를 받게 되었다.
4) 애초에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잇단 자연 재해는 이러한 주장의 신빙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5) 이와 같은 인식이 있었기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이 아닌 ‘묘청의 서경 전역’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6) 신채호는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을 모아 1929년 《조선사연구초》를 펴냈다. 이 책에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과 함께 모두 6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묘청의 난’은 1135년에 일어났다. 신채호는 자신이 처한 시대로부터 약 일천 년 이래 일어났던 사건들 가운데 이것이 가장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보아 이와 같은 제목을 지었던 것이다.
7)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三. 낭(郎) ․ 유(儒) ․ 불(佛) 3교(敎의) 정치상 투쟁
“낭가(郎家)는 매앙 국체상(國體上)에는 독립 ․ 자주 ․ 칭제(稱帝) ․ 건원(建元)을 주장하며, 정책상에는 흥병북벌(興兵北伐)하여 압록 이북의 구강(舊疆)을 회복함을 역창(力倡)하고, 유가(儒家)는 반드시 존화주의(尊華主義)의 견지에서 국체는 중화(中華)의 속국(屬國)됨을 주장하고, 따라서 그 정책은 비사후폐(卑辭厚幣)로 대국을 사(事)하여 평화로 一국을 보(保)함을 역창하여 피차 반대의 지위에 서서 항쟁하였다. (중략) 불교는 … 대개는 낭가와 접근하였다.”
8) 윤관은 고려 예종(睿宗) 때의 관료이다. 윤관은 예종의 명을 받아 1107년(예종 2년)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다. 신채호는 예종과 윤관을 화랑의 사상을 실행하려던 군신(君臣)으로 보고 있으며, 동북 9성의 상실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9)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六. 묘청의 광망(狂妄)한 거동 - 서경(西京)의 거병(擧兵)
“평양은 실로 당시 도성(都城)될 지점에 만만불의(萬萬不宜 : 절대로 마땅하지 않다)하거든 칭제북벌론자가 매양 평양천도를 전제로 함은 비상한 실책이니, 윤언이가 전자(前者 : 칭제북벌론)를 주장코 후자(後者 : 서경천도론)에 부동의함은 과연 탁견이라 이를 것이다.”
10) 신채호는 묘청이 풍수설을 이용해 서경 천도를 주장한 점이나, 대동강에 떡을 가라앉혀 민심을 조종하려 한 점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일들은 묘청 이전에도 매양 번번이 있어왔던 일이었다는 것이다.
11)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十. 결론
“이상 서술한 바를 다시 간략히 총괄해 말하면, 조선의 역사가 원래 낭가(郎家)의 독립사상과 유가(儒家)의 사대주의로 분립하여 오더니 돌연히 묘청이 불교도로서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그 거동이 너무 광망하여 패망하고,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어 낭가의 윤언이 등은 겨우 유가의 압박하에서 그 잔명(殘命)을 구보(苟保)하게 되고, 그 뒤에 몽고의 난을 지나매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고, 이조(李朝)는 창업이 곧 이 주의(主義 : 유가)로 성취되매 낭가는 아주 멸망하여 버렸다. 정치가 이렇게 되매 종교나 학술이나 기타가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 (중략) 아아 서경전역(西京戰役)의 지은 원인을 알고 어찌 중대하다 아니하랴.
12) 신채호는 묘청이 상황을 지나치게 가볍게 파악한 것이 결국 패망의 원인이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묘청을 토벌한 계책 또한 김부식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윤언이로부터 나왔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윤언이는 김부식으로부터 정지상에게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그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13)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七. 묘청의 패망과 윤언이의 말로
“묘청이 비록 그 행동이 광망하였으나 그 주의상 불후의 가치는 김부식류에 비할 자가 아니어늘, 전사에 폄사(貶辭)만 있고 살린 말은 전무하니 이는 공론(公論)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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